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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머니의 노래

해오라비.별꽃 2014. 5. 16. 06:44




어머니의 노래



당신께서 새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은
이태리로 휴가를 떠날 준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흥분된 마음으로
이태리에 관한 안내 책자들을 사고
의사소통을 위한 몇 마디의 말도 배웁니다.
떠날 날이 와서 가방을 챙긴 후 공항으로 갑니다.

착륙한 후 승무원은
"폴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합니다.
당신은 의혹과 놀라움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며
"폴란드라니? 나는 이태리로 가는 표를 샀는데
무슨 말이죠?" 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계획에 변경이 생겼다고
설명했고, 당신은 폴란드에서 내려야 하며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말하기를
"나는 폴란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있고 싶지도 않아요!"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새 여행 안내서를 사서 읽고,
새로운 말을 배우며, 당신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야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질병과 기근이 있는
몹쓸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은 다만 당신이 계획했던 곳이 아닌
다른 장소라는 것뿐입니다.

이곳은 이태리보다 느리고 덜 화려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좀 있다 보면 당신은
폴란드에는 풍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폴란드에는 튤립이 있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에는 램브랜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웃 친구들은
분주하게 이태리를 다녀옵니다.
그들은 이태리에서 얼마나 재미있는
시간들을 가졌었는지를 자랑합니다.

이런 가운데 당신은 살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입니다.
"맞아, 나도 바로 그곳을 가기로 했었지."
이 아픔은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꿈과 계획은
아주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이태리로 가지 못한 것을
슬퍼하며 평생을 지낸다면 당신은 폴란드의
아주 특이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는
자유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미국 장애인 길포드의 어머니가 쓴 글이다. 1980년대에 내가 읽었던 글이니까 그때 어렸던 길포드는 이제 성인이 되었을 게다. 마치 의사들이 Hippocratic 선서를 하듯 나는 이 글을 내 앞날의 지표로 삼으며 진지하고 뜨겁게 이 글에 공감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자신이 장애를 가졌거나 또는 장애인 가족을 둔 사람, 그리고 장애인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자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아름답고도 훌륭한 자기 정체성을 일깨우는 글이라 여긴다.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보며 자기의 처지를 감사하는 마뜩치 않은 심리를 가졌다. 최소한 남의 불행을 보면서 자기 처지를 감사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장애인 교육의 소명을 다하려는 나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바램이다.
길포드는 중증 정신지체 아동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장애를 가진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글이라 더욱 값지고, 현실적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반박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말 아름다운 글이며, 아름다운 삶이다.




더 하여…
세월호 사건으로 인하여 기념식도 하지 않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교육의 한 場이기 때문이다.

결코 선물이나 꽃 따위를 받고 싶다는 게 아니다. 누가 얼마나 믿어줄 진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런 세상도 아니고 말이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받침이 틀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 삐뚤빼뚤에 문장도 엉망인 글이지만 최소한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는 의미만큼은 명백한 그 편지조차 쓰지 못하게 할 이유까진 뭐 있냐는 말이다.

항상 그랬다. 내 기억으론 말이다.
학교에선 어린이 날이며 어버이 날이며 석가탄신일이며 성탄을 제대로 맞기 위해 아이들에게 알맞은 선물과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報恩의 편지와 색종이로 꽃을 만들고 각각의 기념일에 맞는 것을 만들고 보고 듣고 쓰면서 학습을 한다. 소위 계기교육이란 것이다. 그러나 왜 유독 스승의 날만큼은 그 누구도 챙겨주는 사람이 없고, 같은 동료인 교육청이나 기관장들만 축사를 보내오는지… 그런데 이런 상황을 소리 내어 말하기도 쉽지 않다. 왜냐하면, 결국은 그것이 교육의 부재이기 때문임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편으로 생각하자면 현장에 있는 동료들을 보면 ‘스승의 날’이 되면 오히려 무슨 소 도둑인 냥 스스로 옥죄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교과학습보다 우선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배양하는 일이라고 난 늘 믿어왔다. 근데 사회가 우리 교사들을 찍~ 소리도 못 내게 만들고 있고, 그런다고 해서 주눅 드는 교사들 자신에게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도 잘못이지만 항상 우선적인 책임은 각자의 자신에게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同種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교사들 중에 잘못한 교사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 주눅이 든다는 것은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그 누군가에 대한 감사의 情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왜 반드시 교사여야만 하는가? 부모도 될 수 있고, 이웃도 될 수 있고, 이 사회 전체일 수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으로서 잘못되었다면 그건 학교만의 책임이 아니다. 꼭 반반이라고 난 항상 믿는다. 가정과 학교의 반반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스승에 대한 감사만 반드시 교사가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절실하게 궁금하다…
자축할 수밖에 없는, 스승은 있으나 학부모도 제자도 없는 정말 요상한 날, 참으로 쓸쓸했다. 퇴근하면서 교장, 교감샘이 주선하시어 자축하는 회식자리를 마다하지 못한 이유이다. 오늘 엘르랑 약속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사회는 항상 한 쪽에서 터지면 상관없는 영역마저 무너지는 고질병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 누구에게든 바빠서 報恩의 情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생활이란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삶인지 회의가 드는 밤, 쓴 웃음만 나는 ‘나의 날’이고, 살짝 취기 오른 김에 내뱉는 횡설수설이 아님을 누군가는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출처 : 낯선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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