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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붉은 사랑에서,,,(림태주)

해오라비.별꽃 2018. 8. 26. 22:58

               어머니의 사랑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것 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니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데로 살았다

마음데로라는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되어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우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 나올때면

내가 조물주인것 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이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고운 도라지 꽃들이 무리지어 넘실 거릴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걸 내세울 도량이 있을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제첩 한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 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적 니가 나에게 맺힌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지 새끼들 불러 전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섬 챙겨 먹일때

엄마는 왜 못본척 나를 외면 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였고 도리였다

그런데 니가 그 일을 서러워 하며 물을때 마다 나도 가만이 아팠다

생각할 수록 두고 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 보다 니입에 들어가는 떡 한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에미를 용서하거리


투박하기 그지 없다

니가 어미 사는 보았듯이 산다는건 종잡을 수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소낙비가 내리 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그릇 올리고 촛불 한자루 밝혀서 천지 신명께 기댔다

운수 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니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니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니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

세상 사는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에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거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 없이 좋은 날도 있을거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 하고 다녀라

세상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 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줄 것이다


별거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

니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일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대는 채를 가까이 끌어 당겨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나 멀리 날려 보내려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다 놔두지 말고 

바람부는 언덕 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울 일이 없다

나는 니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억척떨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괴롭지 않게 마음 가는 데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 갔지만 

맑게 갠날 사이 사이에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 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데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 하지도 애닲아 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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