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야삼경 눅진한 달빛에 젖은 채 어둠이 느슨해지기 전에
자드락밭 한 뙈기를 보습이 부러지도록 갈아먹더라도 가자
우리 환정(歡情)이란 어둠에 뿌리 내린 꽃
파수꾼보다 촘촘한 반상의 이목을 피해 우리
갈급이 목을 태우는 달포 만에 한 번 해후는 버리고 가자
달하 노피곰 도드샤, 노피곰 도드샤*
작달비 휩쓸고 간 당신 눈자위를 보고 말았다
범람 직전까지 차올랐던 흘수선들 사이로 난분분 추락하는 능소화
춘행길 섶다리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당신 미간에서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하르르 옥색 날개들
볼우물에 자란자란 남실거리던 민들레 웃음소리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 주글만뎡
가자, 야삼경 이 밤내로
일획으로 난초를 긋듯 후미진 모퉁이로부터 일월이 호패(號牌)를 대신하는 곳으로
중천 높이 달이 오르거든 시종 삼아
등롱(燈籠)은 버려두고 도화가 대낮 같이 만발한 곳으로
얼음 위에 댓잎만으로 누워도 당신과 나라면 그만인 곳으로 어서
우리는 가자 이 밤내로
* 정읍사, 만전춘별사
.........................................전영관 시집 [바람의 전입신고, 세계사]
달빛이 옷고름을 흔들고 갈 때까지 미동도 없이 누구를 기다렸나. 함께 도망이라도 갔으면 싶은 내연(內緣)일 것이다. 어둠이란 갈망이 없는 사람에겐 두려움이고 가야할 곳이 있는, 가고만 싶은 이들에겐 지름길이다. 파수꾼이야 피하면 그만이라도 조선시대 반상(班常)의 윤리는 벗어날 길 없는 죽방렴이었을 것이다.
도포 입은 양반네가 보습이 무엇인지나 알고 부러지도록 밭을 갈겠다는 소리를 하나. 이목을 피해야 하는 관계이니 어둠에 뿌리내린 꽃이 맞겠다. 달포에 한 번 만난다면 갈급으로 몸이 타버릴 지경이겠다. 그 심정이야 연애경험이 있는 누구라도 고개를 주억거릴 것이다.
오죽 그리움이 사무쳤으면 눈자위가 젖었겠는가. 작달비 휩쓸고 간 눈망울로 사내를 올려다보았겠는가. 그렁그렁한 눈망울에서 추락하는 능소화를 보다니, 미간에서 날아오르는 나비들을 보다니 역시나 사랑은 귀신의 눈을 가지게 되는 신묘(神妙)다.
고개를 외로 틀었다면 볼우물에 자란자란 담겨있던 민들레 웃음소리가 사내 발등으로 떨어졌겠다.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 아니라도 두둥실 구름 너머로 떠올랐겠다. 미색과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울렁거릴 텐데 웃음까지 흘려준다면 누군들 담담할 수 있겠나.
이 연인들은 야반도주를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달아나겠다고 달더러 높이 좀 솟아오르라 했어도 달이 높으면 달아날 길뿐 아니라 사위가 훤한 법이다. 둘의 얼굴만 보여야 달아날 텐데 동리가, 고샅이 다 보이니 인연의 끈들 때문에 그럴 수 있겠는가.
얼음 위에 댓잎만 깔고 누워 얼어 죽어도 좋다지만 얼어 죽자고 도망가려는 게 아니고 얼어 죽을 거란 예감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뜨거운 가슴의 부글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달을 시종 삼아 호패도 필요 없는 곳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거다.
등불이 없어도 도화 만발했으니 서로를 여겨보고 어루만지고 사나흘 포옹을 풀지 않아도 괜찮을 곳으로 가자는 거다. 밤은 짧고 어둠 속에 가야할 곳이 있는 사람에겐 새벽이 더 가깝고 사랑이 깊은 사람의 가슴은 유난히 얇다.
신윤복은 능갈치듯 “달도 기운 야삼경(월심심야삼경, 月沈沈夜三更)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양인심사 양인지, 兩人心事 兩人知)”라는 화제(畵題)를 붙여놓았다. 척 봐도 알겠는데 무슨 말씀이신가. 남녀상열지사야 어디 사서삼경을 떼야만 터득할 수 있는가.
부디 이들이 파멸하지 않기를 바란다. 수백 년 지나도록 저리 만나고 애틋하면 대리만족하겠다. 먼지도 없이 스러진 내 사랑들과는 다르기를, 서로가 변심하지 말기를 폐허에 혼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