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 문 인 수
호박 눌러 앉았던, 따 낸
자리.
가을의 한복판이 움푹
꺼져 있다.
한동안 저렇게 아프겠다
10월 / 오세영
무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10월 /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시월에 /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시월 / 민용태
하늘에서 걸려오는 전화벨소리
떼각떼각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소리
사무실이 바닥보다 창문 높이로 올라서고
벽에서는 횟가루 대신 구름냄새가 난다.
먼 구름에서 알밤이 빠지듯
너는 그렇게 내 품에 떨어진다.
너의 얼굴을 보면 보석을 머금고 있는 것이
석류만이 아닌 것을 안다.
너의 가슴을 보면
사과나무 가지가 휘어진다.
서류뭉치들이 연이 되어 나르고
시계추 끝에선 포도송이가 여린다.
시월은 하늘과
하늘의 친척들이 몰려오는 달
꿈과 기다림이 현금으로 거래되고
온 도시가 잠깐
하늘의 식민지가 되는
10월 /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을 따 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걸음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오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편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10월
시월 / 전동균
백련산 밑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 녘이면 울음을 참듯
고개 숙인 나무들 아래
默言修行묵언수행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 길 앞에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10월 /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시월愛 / 심여수
그대여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 들어라
지붕 위로 기어 오르는 망각하고
있었던 기억의 소리 들어라
반쯤 감은 석양의 눈이 그리움으로
못내 붉은 눈물 떨어뜨리는 소리 들어라
혀가 굳고 말이 엇갈리는 지독한 사랑은
소리조차 없는 매마른 바람의 얼굴로
오더라도 만남과 또 헤어짐으로 가득 찬
오래전의 가을과 지금의 가을이 버무린
시간 속에서 문득 시월에 멈추어
낙엽이 그리워하는 소리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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